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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추도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20-0. 조선인 추도비 건립자들

일본 효고(兵庫)현 다카라즈카(寶塚)시에서 북쪽으로 5킬로미터쯤 떨어진 키리하타(切畑)의 나가오(長尾)산 기슭에는 조선인 추도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옛 국철 후쿠치야마선(福知山線) 폐선 부지에 조성된 벚꽃동산() 입구, 신수이(新水) 광장에 세워진 이 비석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라고 불리고 있다.

 

이 추도비가 건립된 것은 2020 326일이다. 일제강점 초기인 1910-1920년대에 이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토목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하신 조선인 노동자 5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현지의 일본인 시민과 재일동포들은 일본 초기 근대화를 위해 치러야 했던 이 분들의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 추도비를 건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추도비의 전면에는 추도비 주인공들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김병순(金炳順, 1914년 사망), 남익삼과 장장수(南益三, 張長守, 1915년 사망), 윤길문과 오이근(尹吉文, 吳伊根, 1929년 사망) 5명이었다.

 

 

내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2019 11월초였다. 그때 나는 <재일조선학생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하러 오사카에 갔다가 우연히 교분을 갖게 된 이타미 거주 사진가 정세화 선생으로부터 이 추도비가 건립중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이 추도비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는데, 당시 나는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일본 공연을 조사하는 일에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예술경연대회>를 참관한 것도 무용경연대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무용경연대회를 통해 나는 재일 조선학교의 무용이 80여년전 최승희 선생이 시작했던 조선무용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신했다.

 

그때까지 나는 다카라즈카를 두 번 방문했었는데, 그곳에서 열렸던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공연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 답사에서 다카라즈카 대극장을 포함해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보았지만, 그곳이 재일 조선인들의 밀집 주거지역이라는 것도 감지하지 못했었다.

 

 

나는 2020 1월에 다시 고베를 방문했다. 정세화 선생의 초대로 고베조고의 연례 취주악연주회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비로소 조선인 추도비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 추도비에 대한 현지인들의 관심이 아주 높다는 점과 이분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추도비가 건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비로소 ‘1백 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에게 왜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 것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의문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고, 질문할 때마다 정세화 선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안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셨다. 추도비의 희생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지, 그리고 현지인들이, 인본인과 재일동포를 불문하고, 왜 그렇게 애착을 가지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리고 이분들이 희생자들의 한국 내 연고를 애타게 찾고 있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일본인 콘도 토미오 선생과 재일동포 정세화 선생은 추도비 건립에 대해 각별한 열심을 내고 계셨다. 콘도 토미오 선생은 다카라즈카의 중등학교에서 국어(=일본어) 교사로 오래 재직하신 후 정년퇴임하신 분으로 2000년에 작고하신 재일동포 향토역사가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이 추도비를 꾸준히 추진해 오신 것도 알게 되었다.

 

 

정홍영 선생은 1970년대 후반부터 다카라즈카를 비롯한 효고현 곳곳을 조사하고 답사해 조선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과정과 지역 토목공사에 참여한 상황, 이들이 받았던 차별대우와 악조건 속에서도 분투하며 이루어낸 조선인 공동체에 대한 기록을 남기셨다. 이러한 조사 내용은 그의 저서 <가극의 도시의 또 다른 역사: 다카라즈카와 조선인(1997)>에 담겨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의 건립은 정홍영 선생의 소원이었는데, 그가 타계하신 후 그의 오랜 연구 파트너이셨던 콘도 도미오 선생이 이를 이어 받았다. 다카라즈카 학술단체와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콘도 도미오 선생은 정홍영 선생의 유지를 잊지 않았고, 결국 정홍영 선생 사후 20년 만에 그의 뜻을 이루어 드린 것이었다. (jc, 2022/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