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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추도비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19-5. 강제동원 피해자 조사

이상의 상황을 고려할 때 김상민 연구사의 설명은 대부분 설득력이 있었다. 경상남도 고성의 8만인구 중에서 이미 1920년대부터 상당한 비율이 일본으로 도항했고, 도항자의 대부분은 남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먼저 도항한 사람들이 주거와 일자리를 찾은 후 다른 가족들을 합류하도록 했기 때문에 노동이민자 수는 더욱 늘어났을 것이다.

 

윤길문씨의 경우도 아버지 윤재유, 삼촌 , 큰형 윤일선, 형수 여시선, 사촌형 윤창선 등의 가족들과 함께 다카라즈카로 이주하여 후쿠치야마선 철도공사에서 터널 굴파 노동에 종사하던 중 사망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사망한 오이근씨도 오이목이라는 사람과 함께 거처하고 있었고, 두 사람의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이들은 아마도 형제이거나 적어도 사촌형제였을 것이다.

 

김상민 연구사의 조사방법이 희망을 준 것은 사실이다.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을 가능성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전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첫째, 강제동원 피해자가 아닌 신고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적어도 수백명, 많으면 1천명이 넘을 수도 있었다. 이 신청서들은 전산 처리된 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한 데이터베이스 검색이 불가능하다. 그 대신 일일이 신청서를 넘기면서 이름과 주소, 가족사항과 이주지 등의 정보를 일일이 살펴야 한다.

 

 

둘째, 그같은 지난한 조사를 통해서도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을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았다. 단적으로 윤길문, 오이근씨의 가족이나 친척, 후손이 강제동원 피해자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자세히 조사를 한다고 해도 찾아내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그럴 가능성은 대단히 높았다. 윤길문, 오이근씨가 사망한 것이 1929년이므로 이들이 경남 고성을 떠난 것은 그 이전이다. 이들의 나이가 이때 21세와 25세였으므로 대략 1905년에서 1910년 출생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일본으로 노동이민을 떠난 것을 직접 보았거나 1차로 전해 들었을 사람들의 나이는 2004년 현재 70세에서 1백세에 달할 것이다. 그중에서 이들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착각해 신고서를 제출한 사람이 얼마나 될른지는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이다.

 

 

셋째, 만에 하나 윤길문씨나 오이근씨를 강제동원 피해자로 착각한 신고서가 접수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폐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같은 신청서의 문서 보존연한은 통상적으로 3년 혹은 길어야 5년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펴볼 신청서 자체가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김상민 선생의 조사 방법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면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일까? 가진 자료는 경남 고성군 고성면 출신의 윤길문(尹吉文, 21)’ 오이근(吳伊根, 25)’라는 한자 이름과 그들의 나이 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사람의 이름이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본관과 이름의 항렬을 알면 이들의 친족관계가 폭넓게 파악될 수 있다. 이는 족보에 기록되어 있고, 족보에서 이들의 이름을 찾아내면 오늘날까지 생존한 가족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으며, 그들의 협조를 받으면 호적 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들의 족보기록을 찾아내는 것이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탐문의 방법이 있다. 고성군 내의 집성촌을 찾아가 탐문하거나, 혹은 언론의 협조를 얻어서 공개적으로 윤길문, 오이근씨의 행적을 탐문해 가족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길문, 오이근씨의 연고를 찾는 문제는 시간을 다투는 시급한 문제는 아니므로, 우선 김상민 선생의 조사를 기다려 보기로 하고, 서로 연락처를 교환한 후에 고성의 1차 취재를 마치기로 했다. (jc, 2022/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