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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순회공연

[중남미 순회공연] 4. 푸에르토리코 공연 전후 (3) 시카고 공연

1940217일 뉴욕 콜럼비아 대학 맥밀란 극장 공연을 마치자마자 최승희는 바로 시카고로 향했다. 222일 시카고의 시빅 극장(Civic Theatre)에 공연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 공연 후 5일 만에 시카고 공연을 가진 것은 이례적이다. 뉴욕에서 시카고까지의 거리 때문이다. 오늘날 뉴욕-시카고의 80번 고속도로는 약 8백마일(=13백킬로미터), 제한속도 시속 65마일(=시속 104칼로미터)를 지킨다면 자동차로 12시간이 걸린다.

 

 

1940년에는 뉴욕 그랜드센트럴 역에서 시카고 라살레 스트리트 역까지의 철도 연장이 1,546킬로미터였다. 당시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던 평균 시속 97킬로미터의 쾌속열차 <20세기 리미티드(20th Century Limited)>로도 16시간이 걸렸다.

 

이 쾌속열차는 매일 저녁 6시에 뉴욕 그랜드센트럴 역을 출발, 다음날 아침 9시에 시카고 라살레역에 도착했다. 217일의 공연을 마치고 다음날 저녁6시에 뉴욕에서 출발하는 쾌속열차를 탔더라도, 19일 오전9시에 시카고에 도착했을 것이다. 222일의 시카고 시빅 극장 공연의 무대와 음향과 조명을 준비하고, 리허설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이틀뿐이었다.

 

다음 공연은 310일의 시애틀 공연이었다. 최승희는 32일 시애틀에 도착했다. , 시카고 공연을 마친 최승희는 약 일주일 동안 시카고에 더 머물렀고, 23일 동안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 시애틀까지 이동하고도, 공연 8일 전에 현지에 도착한 것이다. 무대 준비와 리허설 때문이다.

 

 

그런데 시카고 공연 일정은 왜 그렇게 촉박했을까? 당시 시빅 극장은 수용인원이 약 9백석으로 그리 크지 않았지만, 연극과 무용공연 극장으로는 시카고에서 가장 유서깊고 선호되던 극장이었다. 특히 무용가라면 누구나 이 극장에서 공연하고 싶어했다. 당시 시카고의 시빅 극장은 파리의 샤이오 극장이었다.

 

시빅 극장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 이 극장은 시카고를 연극과 무용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극장으로서 유명 작품이 초연되고, 혁신적인 연출이 공개되고, 아르데코 양식의 내외 장식이 멋질 뿐 아니라, 분위기가 편안한 곳이었다고 한다. 이 극장은 시카고 예술가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시카고의 보석상자로 기억되었다.

 

시빅극장은 1928년에 개관했다. 1929년 시빅 오페라하우스가 완공되면서, 이 두 극장은 시카고 강과 바커 드라이브(Wacker Drive)사이에 남북으로 나란히 자리잡았다. 시빅 극장의 정문은 남쪽 워싱턴 스트릿(Washington Street), 시빅 오페라하우스의 정문은 북쪽 매디슨 스트릿(Madison St.)에 있었다. 등을 맞댄 두 극장은 한 블록 전체를 시카고 무대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 정도의 최상급 극장을 일주일 만에 섭외하기란 그때나 지금이나 불가능하다. 최승희의 흥행사가 미국 양대 흥행사의 하나였던 메트로폴리탄 뮤직 뷰로였더라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 정도 명성의 흥행사였기 때문에 시카고의 시빅극장 공연을 성사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런 흥행사가 시빅극장 공연을 촉급하게 섭외했을 리가 없다.

 

촉급하게 섭외된 공연은 시카고 공연이 아니라 뉴욕 콜럼비아대학 공연이었을 것이다. 흥행사는 당초 19391228일의 뉴욕 공연과 1940222일의 시카고 공연을 섭외했을 것인데, 이는 두 공연의 시기와 거리를 고려할 때 합리적인 일정이었다.

 

 

그런데 세인트제임스 극장 공연이 끝나자 12월 말 <뉴욕타임스> 등의 일간지들과 18일자 <뉴스위크>가 최승희의 공연을 극찬했고, 콜럼비아 대학의 <댄스 시리즈>가 공연 한 달 반을 앞두고 최승희를 초청했다. 시카고 공연을 생각하면 소화하기 어려운 공연이었지만, 최승희는 콜럼비아대학 공연의 상징성과 중요성을 고려해 이를 수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빅 극장은 1948년부터 ABC텔레비전 방송국의 스튜디오로 변신했다가, 1993년 오페라하우스에 흡수되어서, 지금은 현판을 제외하면 본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jc, 2023/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