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2025보성] 14. 득량만의 장군쟁이
소록도에서 봉강리로 돌아가는 길에 일행은 845번 도로변의 장군쟁이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10번 고속도로 대신 지방도로를 선택한 것은 득량만의 아름다운 해변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이어지는 바다와 갯벌을 보자 맨발걷기 매니아 이원영 선생은 차를 세우고 쉬었다 가자고 제안했다. 한 달이면 몇 차례씩 인천 무의도 하나개 해수욕장 갯벌을 찾는 이원영 선생으로서는 득량만의 깨끗하고 넓은 갯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일행이 버스를 내린 곳에는 야영과 차박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 장군쟁이 휴게소였는데, 부드럽게 휘어들어온 해변이 아름답고 깨끗했다. 이원영 선생은 당장 맨발로 모래갯벌을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장군쟁이’라는 휴게소 이름이 궁금했다. 지명인지 상호명인지 확실치 않았는데, 적어도 했지만, ‘장군’이라는 말과 ‘쟁이’라는 말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쟁이’는 ‘장이’와 어원과 뜻이 같은 말이었겠지만 1988년의 맞춤법 개정안에서는 ‘장이’는 수공업자의 직업이름, ‘쟁이’는 대체로 부정적 특징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갈라놓았다. 대장장이, 도배장이, 땜장이 등은 전자의 예이고, 개구쟁이, 수다쟁이, 심술쟁이, 욕심쟁이 등은 후자의 예이다. 그러니 ‘장군쟁이’라는 말은 어법에 맞지 않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이 해변의 지명이 ‘장군’인 것은 확실했다. 구글 지도에는 ‘장군쟁이 휴게소’가 ‘장군’에 위치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장군’은 이순신(1545-1598) 장군을 가리키는데, 이 지역이 이순신 장군과 깊이 관련된 곳이기 때문이다.
우선 보성은 1597년 9월 이순신 장군이 병사와 군량을 모으면서 지나간 곳이다. 원균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백의종군 하던 이순신은,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자 통제사로 복직됐다. 그는 선조의 교지를 받고 도원수부가 있던 초계를 출발해, 사천과 하동에서 남은 병력을 점검한 후, 진주, 하동, 구례, 곡성, 순천, 낙안, 그리고 보성과 장흥을 거쳐 해남에 진을 설치했었다.
보성은 또 이순신 장군의 장인 방진(方震, 1514년-?)의 근무지였다. 이순신은 21세였던 1565년 병조판서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의 중매로 온양 방씨 집안의 재력가 방진의 딸 방수진(方守震, 1547-?)과 결혼했고, 장인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워 1576년 식년시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었다. 방진은 제주 현감(1535-1537)을 거쳐 1958년 보성 군수를 역임했다.
이순신의 아내 방수진이 등장하는 보성의 일화가 있다. 그녀가 12세 때 집에 화적(火賊)이 쳐들어오자 활을 잘 쏘는 부친 방진이 화살을 쏘아 집을 지켰다. 화살이 떨어지자 딸이 물레에 쓰는 대나무 가락을 마루바닥에 쏟으면서 “아버님, 여기 화살”하고 소리를 쳤고, 이 말에 놀란 화적들이 물러갔다는 이야기다.
다만 이 일화가 실제로 보성에서 일어난 것인지에는 일말의 의문이 있다. 방수진이 12세였다면 부친 방진의 보성군수 재직시였음에 틀림없지만, 관군이 수비하는 군수 관저에 화적이 쳐들어왔다는 설정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1597년 8월28일의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했고 판옥선은 불타거나 일본군에 의해 오사카로 끌려갔다. 백의종군에서 해제된 이순신 장군은 수영을 설치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보성에서 군량미 4백석을 마련했다. 이 지역 이름이 득량(得糧)이 된 것도 ‘군량미(糧)를 얻었다(得)’는 뜻에서 유래했다.
또 장군쟁이 휴게소에서 해변을 따라 버스로 30여분 올라가면 선소(船所)인데, 이곳은 조선 수군의 군선, 판옥선을 건조하던 곳이기도 하다.
즉 보성군은 재기하는 이순신 장군에게 병사와 군량과 병선을 제공했던 곳이며,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성원과 함께 그의 장인 방진에 대한 보은의 생각이 강했던 곳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장군쟁이’라는 이름이 지명이라면, 이는 ‘장군의 장인’이라는 뜻으로 지어졌다가 이 지역 방언과 억양 때문에 ‘장군쟁이’라고 정착된 것일 수도 있다고 추정된다.
일행은 장군쟁이 해변에서 순천의 박미연 선생이 정성껏 준비해 오신 건강 젤오를 간식으로 먹으면서 느긋하고 신선한 시간을 가졌는데, 이곳이 이순신 장군과 그의 가계의 이야기가 짙게 서린 곳이라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jc, 2025/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