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2025보성] 13. 당신들의 천국
소록도라는 이름은 “작은 사슴”모양 때문에 붙은 것이라지만, 녹동항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그다지 사슴 모양으로 보이지 않는다. 지도를 보면 게임기 콘트롤러 모양에 가깝다.
소록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넓이 150만평(약 4.4Km2), 해안선 길이가 14킬로미터라고 하니까 한번 산책에 도보로 4시간쯤 걸린다. 소록도의 절반은 주민 622명의 주거지역으로 방문자가 접근할 수 없지만, 소록대교를 건너면서 시작되는 데크길을 따라 박물관 건물까지 걸으면서 보이는 해변과 바다, 그리고 군데군데 뜬 섬들이 무척 아름답다.
박한용 선생은 소록도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당신들의 천국(1976)>을 읽기를 권했기 때문에, 주말에 그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은 조선일보 이규태 기자의 르포르타주 <소록도의 반란(1966)>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고 하며, 1974년 4월부터 월간지 <신동아>에 21회에 걸쳐 연재되었다가, 1976년 5월 문학과지성사에 의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는데, 약 30년이 지난 2003년에 100쇄를 발행했을 만큼 베스트셀러 겸 스테디셀러였다.
그 시절 매일 학교 도서관에 들러 신문소설을 읽었기 때문에 최인호의 <불새(1979)>와 박범신의 <풀잎처럼 눕다(1979)>를 읽었는데도 <당신들의 천국(1976)>을 접하지 못한 것은 나의 본격적 독서가 시작되기 전이었고, 월간지에 연재되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대학시기에는 하도 읽을 게 많아서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되는 일이다.
<당신들의 천국>이 준 생각을 한꺼번에 정리하기는 어려우므로, 소록도에서 병원장을 맡았던 인물에 주목해 보았다. 역사와 소설을 합치고,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를 통틀어 소록도 나병원의 원장은 세 전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일제강점기의 2대 원장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 1868-1929, 재임 1921-1929)이다. 그는 원생들에게 선정을 베풀다가 소록도에서 순직했다. 일본식 생활을 강요했던 초대 원장의 규제를 모두 풀고, 조선식 의복과 식량을 개선하고, 원생들에게 통신과 면회의 자유를 부여했다. 중증환자 병동을 신설하고, 원생들을 위한 오락시설을 설치하는 한편, 총독부가 경계하던 신앙의 자유도 허용했다. 하나이 원장이 순직하자 원생들이 자발적으로 창덕비(彰德碑)를 세웠고, 해방 직후 창덕비가 파괴될 위험에 처하자 원생들은 이를 땅에 묻었다가 후에 재건했다.
둘째는 4대 원장 스호 마사스에(周防正季, 1885-1942, 재임 1933-1942)이다. 그는 군의관 출신의 마약과 나병시설 전문가로, 소록도를 세계 최고의 나요양시설로 만들겠다며 3차에 걸친 대규모 토목공사를 시행, 원생들에게 폭력적 강제 노역을 부과했다. 1940년에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매월 20일 원생들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스호 마사스에는 1942년 6월20일 자신의 동상 앞에서 원생 이춘상(李春相)에 의해 칼에 찔려 죽었다.
셋째가 <당신들의 천국>의 조백헌 대령이다. 그는 군의관 출신의 현역 대령으로 일제강점기의 스호 마사스에를 연상시키지만, 나름 선의를 가지고 시설 발전과 처우 개선에 노력한다. 하지만 원생들은 조대령이 자신의 권력욕과 성취욕을 위해 원생들을 이용하는 인물로 의심한다. 결국 그는 야심차게 시작했던 오마도 간척사업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소록도를 떠난다. 7년 후에 민간인 신분으로 소록도에 돌아온 조백헌은 서미연과 윤해원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섬사람들과 함께 믿음과 사랑이 바탕이 되는 진정한 천국의 건설을 꿈꾼다.
사회에서 배제되어 천국같이 아름다운 소록도에 격리된 원생들은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하지만, 리더십에 따라 천국을 꿈꿀 수도 있었다. 스호 처럼 소록도를 지옥의 밑바닥처럼 운영하다가 원생들의 반란으로 처단되는가 하면, 하나이 처럼 선의와 자유를 바탕으로 원생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칭송을 받기도 한다. 조백헌은 스호로 시작해서 하나이로 이행하는 인물로 묘사되었지만, 그의 시도가 성공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당연히 소록도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초기의 조백헌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를 연상시킨다. 지옥의 천국화라는 꿈이라도 꿀 수 있게 된 것은 조백헌이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되어 돌아온 이후의 일이다. (jc, 2025/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