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2025보성] 11. 최승희 벌교공연
벌교 꼬막정식으로 점심을 마친 후에 일행은 소록도로 향했다. 소록도는 고흥반도를 남으로 가로질러 6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으므로 버스로는 약 1시간 남짓의 거리였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채동선 생가 앞에서 시작한 최승희 선생의 1931년 벌교공연 강연을 계속했다. <벌교극장>의 설립자 채중현 선생과 최승희 공연을 주선했을 것으로 추정된 채동선 선생의 이야기를 요약한 다음, 벌교공연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었을 것인지 설명했다.
최승희 공연이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혼자 벌교에 온 것은 아니다. 최승희 무용단은 10여명의 무용수들과 조명, 음악, 무대장치를 담당한 5-6명의 스탭, 그리고 단장인 부친 최재현 선생, 매니저 역할을 맡은 오빠 최승일과 남편 안막 등을 포함해 20여명의 규모였다.

전날(1931년 12월5일) 광주 제국관 공연을 마치고 12월6일 아침 경전선으로 보성에 도착한 최승희 무용단이 여장을 푼 곳은 어디였을까? 처음에는 보성여관이 아니었을까 짐작했지만, 이 여관의 개업시기가 1935년이므로 최승희 무용단이 이곳에서 숙박할 수 없었다. 초청자인 최중현 선생이 무용단을 자택에 수용했다면 최승희 선생도 채동선 생가에서 묵었을 것이다.

벌교 공연 연목은 14개로 추정됐는데, 이 공연의 프로그램이 9월1일 단성사에서 열린 제4회 경성공연의 프로그램과 유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중 5개를 강연에서 소개했다.
<자유인의 춤>과 <십자가>는 최승희의 독무였고, <철과 같은 사랑>은 수제자 김민자와 함께 상연한 2인무였다. <자유인의 춤>이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제목과 한 장의 사진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제목으로 미루어 조선에 대한 일제의 억압과 이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거듭날 희망을 표현한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십자가>는 당시 조선을 휩쓸던 브나로드, 즉 농촌계몽운동을 배경으로, 조선 민중의 고난과 농촌운동가들의 인내를 소재로 했을 것으로 짐작했다. 1929년 11월3일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이 일제에 의해 진압된 후, 조선의 젊은이들은 독서회를 조직해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는 한편, 민중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민족언론과 개신교의 지원을 받으며 조선 전역으로 확산된 농촌계몽운동은 후일 심훈(1901-1936)의 <상록수(1934)>로 작품화되었는데, 최승희 선생은 그에 앞서 독무 <십자가(1931)>를 안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이 실제인물 최용신(崔容信, 1909-1035)이었는데, <십자가>는 최용신의 행적을 무용화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함경남도 덕원군 두남리(=오늘날의 원산)에서 출생한 최용신은 루씨여학교(1924-1928)와 협성여자신학교(=감리교신학대학교, 1929-1931)를 졸업한 후, 1931년 10월부터 YWCA의 지원을 받으며 경기도 안산 샘골에서 농촌계몽운동가로 일하던 중, 1935년 1월18일 병사했다.

최승희의 작품 <십자가(1931)>가 최용신의 행적을 직접 묘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개신교가 고난의 상징으로 삼는 ‘십자가’를 작품의 제목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당시 개신교가 적극 지원한 농촌계몽운동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는지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김민자와 함께 상연한 <철과 같은 사랑>은 1931년 2월의 제3회 경성공연에서 발표한 <그들의 로맨스>를 개작한 작품이다. 사라사테의 <안달루시아 로맨스>를 반주음악으로 가난한 연인이 희망을 가지고 고난을 이겨나간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1934년 9월의 제1회 도쿄공연에서 <희망을 안고서>라는 제목으로 재연되었다.

그밖에도 최승희 선생이 안무한 첫 현대무용 <인도인의 비애(1929)>와 첫 조선무용 <영산무(1930)>도 설명했다. 두 작품은 제4회 경성공연 이전에 안무되고 발표된 작품들이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초기 작품을 소개한다는 뜻에서 강연에 포함시켰다.

강연 내용이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벌교꼬막정식으로 배가 잔뜩 부른 일행은 달리는 버스가 선사하는 가벼운 소음과 진동으로 기분 좋은 졸음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강연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고, 특히 최승희 선생의 벌교공연을 현지에서 강연할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jc, 2025/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