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2025보성

[은하수2025보성] 10. 나철과 대종교

조정희 2025. 5. 23. 19:38

벌교를 출발하면서 박한용 선생은 벌교가 대종교 창시자이며 독립운동가 나철(羅喆, 1863-1916)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고 알려 주셨다. 원래는 나철 선생의 탄생지를 방문할 계획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라서 건너뛴 것 같았다. 이런 유드리는 참 좋다.

 

 

그 대신 박한용 선생은 자신이 정리하신 나철 선생과 대종교에 대한 발제문을 추천하셨는데 나는 벌교를 떠나는 버스 안에서 읽어볼 수 있었다. 이하는 박한용 선생의 발제문 요약이다.

 

나철 선생은 1863122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출생했다. 1891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했고, 1894년 홍문관의 부정자(副正字), 1895년 가주서(假注書), 1896년 탁지부의 징세서장(徵稅署長)에 제수됐다. 1898년 사직하고 귀향, 1904년에 호남 출신의 지식인들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 19056월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객들에게 동양 평화책을 제의하며 민간외교를 전개했으나 관심을 얻지 못하자, 황거 앞에서 3일간 단식 농성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 자신회(自新會, 훗날 5적 암살단으로 개칭)를 결성, 1907320일 오전10시 광화문에서 군부대신 권중현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조선총독부 문서에는 이 사건이 '을사오적 암살 미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이 사건은 이후 항일 의열 활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자수한 나철은 10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전남 지도(智島)로 내려갔다. 1908년 태황제 고종의 사면으로 풀려난 후, 190925일 한성에서 단군교를 창시했다. 이듬해 1910115일 대종교로 개칭했는데, 1년 사이에 신도 수가 2만여 명으로 급증, 동간도에 지사를 설치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단을 만주로 이동,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대거 뛰어들었다. 교세가 확장되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10<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대종교와 자신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나철 선생은 1916912(음력 815),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배검(단군)에게 제천의식을 올린 뒤 순명삼조(殉命三條)를 남기고 자결했다. 그가 유서로 남긴 순명삼조란 (1) 대종교와 (2) 한배님(=단군)(3) 인류를 위해(三條) 목숨을 끊는다(殉命)는 뜻이다. <신단실기(神檀實紀)>, <삼일신고(三一神誥)>, <신리대전(神理大全)> 등의 대종교 관련 저서를 남겼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나철 선생이 서거한 후에도 대종교는 2대 교주 김교헌, 3대 교주 윤세복의 지도 아래, 동서남북의 4대본사로 나누어 이상설과 이시영(북도본사), 서일(동도본사), 강우(남도본사), 신규식과 이동녕(서도본사) 등이 대종교와 독립운동을 이끌게 했다.

 

 

여러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1) 서일,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이범석 등의 무장독립운동 세력, (2)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등의 민족사학자, (3) 주시경, 지석영김두봉 등의 한글학자, 그리고 (4) 이시영, 신규식, 안재홍, 이동녕 등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모두 대종교 사상으로 활동했다. 다시 말해 항일 무장투쟁과 더불어 민족사학과 한글운동 등의 민족 정체성 운동이 대종교의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추진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일제강점 시기의 3대 대첩인 봉오동 전투(19206, 홍범도), 청산리 전투(192010, 김좌진), 대전자령 전투(19337, 지청천)가 모두 대종교의 무장투쟁 장군들에 의해 승리로 이끌어졌고, 일제강점기의 한글운동의 주역 주시경과 이극로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1942년 만주에 거주하던 3대 교주 윤세복이 경성에 거주하던 조선어학회 초대 이사장 이극로에게 보낸 편지가 일제에 압수됐고, 이 편지 중의 일어나라, 움직이라! 한배검(=단군)이 도우신다!”는 구절이 항일운동을 부추긴 것이라며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는데, 그 결과가 조선어학회 사건(194210)과 임오교번(194211)이었다.

 

 

오늘날 벌교에는 금정마을에 나철 선생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세워졌고, 857번 도로 중 벌교역에서 진트재까지의 구간이 나철 선생의 호를 따서 홍암(弘巖)라고 명명되었다. (jc, 2025/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