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1931벌교공연] 9. 서도현과 김회산
벌교에는 채중현 말고도 부호가 많았다. 박사윤, 최재학 등도 벌교의 부호였으며 채중현과 함께 보성군과 벌교읍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들은 대지주이자 가문이 대대로 부자였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벌교에는 가난한 살림에서 출발한 자수성가형 백만장자도 있었다.
1923년 조선 전역에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보성에서는 벌교면의 김회산(金會山)과 최재학(崔在鶴)이 1천원씩, 채중현(蔡重鉉)과 박사윤(朴士胤)이 각각 9백원을 기부하면서 벌교의 모금목표액 4만원을 달성한 바 있다. (<조선일보, 1923년 11월28일, 4면)>).

최재학과 채중현, 박사윤은 벌교 지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부호였지만, 김회산은 이름이 낯설었다. 민족교육을 위해 1천원을 쾌척한 사람이므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조사해 보기로 했다.
김회산은 벌교의 부호 서도현(徐道鉉)의 아내로 확인됐다. 1916년 7월4일자 <매일신보>는 서도현이 62세, 1932년 1월18일자 <동아일보>는 김회산이 73세로 보도되었으므로, 서도현은 1854년생, 김회산은 1860년생이었을 것이다.
김회산은 18세였던 1878년에 24세의 서도현과 혼인했는데, 당시에 이 부부는 “심히 빈한”했다고 한다. 부부는 벌교장터에서 여름에는 참외장사, 겨울에는 기름장사로 수년간 1백여원의 자금을 모았다. 이를 밑천으로 서도현은 부산으로 건너가 대일무역으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가 50세 되던 1904년경에는 전남의 부호로 이름이 알려질 정도가 되었다.
서도현-김회산 부부는 부유해진 후에도 재산을 잘 관리하는 한편, 교육사업에 아낌없이 기부했다. <동아일보(1932년 1월18일, 2면)>는 서도현이 “벌교공립보통학교를 창립하여 자신이 교장이 되어서 육영사업에 힘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일어나는 지방 일이며 자선사업에도 사재를 아끼지 아니하”였다고 보도했다.

서도현은 1909년 3월1일 유신(有身)학교를 설립해 조선인 아동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그 자신이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육영사업을 도모했다. 유신학교는 1917년 4월14일 벌교공립보통학교로 발전했고, 지금의 벌교초등학교로 11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서도현은 1916년 5월29일 밤11시경 벌교면 송정리 자택에서 강도단에게 권총으로 사살되었고 그 자리에서 가족들은 현금 1천원을 강탈당했다. 일제 경찰과 헌병, 가족들이 범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과부가 된 김회산은 여자의 몸으로 재산을 관리하기가 어려워서 서도현의 조카 서인선(徐仁善)과 당질(堂姪, 5촌조카) 서정인(徐正仁)을 재산관리인으로 지정했다. 1917년 12월7일 서인선(徐仁善)이 별교면 고읍리 자택에서 강도단에 의해 납치당했고, 몸값 1만원을 요구당했다. 김회산이 서정인(徐正仁)을 시켜 7천원의 몸값을 지불하자 서인선은 귀가했으나 몸값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서정인이 다시 볼모로 잡혔다. 후에 서정인의 몸값으로 3천원이 더 지불됐다.

그 이후에도 집안의 우환이 계속됐다. 김회산의 양자 서용인(徐龍仁)은 모르핀 중독으로 폐인이 되었다가 1920년 7월에 괴질로 사망했고, 서인선도 피납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모르핀 중독자로 전락했다. 서정인은 부랑자들과 어울리며 서도현의 재산을 낭비하던 중, 1927년 4월7일 광주군 지한면 홍림리 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서정인이 사망한 이후 서씨 집안의 우환이 그쳤는데, 후에 김회산의 계략으로 서정인이 백부 서도현을 사살하고, 가짜 인질극을 벌여 백모로부터 돈을 갈취한 범인임이 밝혀졌다.

자수성가한 백만장자 서도현의 집안은 그 재산과 명성이 후대에 이어지지 못했다. 가족들의 재산 다툼과 방탕과 모르핀 중독이 원인이었다. 서정인의 백부 살해사건이 밝혀진 후 김회산은 벌교의 재산을 정리하고 순천으로 이주했다.
서도현-김회산 부부의 불행했던 결말을 보면서, 채중현의 부와 명성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채중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보기로 했다. (jc, 202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