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1935다카라즈카

[다카라즈카1935공연] 1. 이상한 동선

조정희 2025. 2. 18. 12:51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취재하다보면 작은 실마리가 중요한 발견을 이끌기도 한다. 지방 공연이나 해외 공연이 특히 그랬다. 경성이나 도쿄의 공연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과 화보가 남아 있지만, 지방 공연과 해외 공연의 자료는 비교적 제한적이기 때문에 사소해 보이는 정보라도 이를 꼼꼼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예컨대 최승희의 스승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조사하던 중에 발견된 사진 한 장이, 최승희의 초무대가 도쿄의 호가쿠자(邦樂座, 1926622)가 아니라 오사카의 공회당(公會堂, 1926612)임을 추론할 수 있게 했다. 이 추론은 추가 조사를 통해 발굴된 오사카마이니치신문의 기사(1926610)로 확인되었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칸공연(1939226)과 마르세유공연(31)의 일정과 동선이 이례적이었는데, 파리에서 출발한 최승희가 소도시 칸에서 주말 공연을 했고 뒤이어 대도시 마르세유에서 주중 공연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나는 최승희가 프랑스 대혁명 150주년의 축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마르세유에서 삼일만세운동 20주년 기념공연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추론했다. 이 추론은 아직 다른 자료로 뒷받침되지 못했고, 아마도 이를 증명하는 문헌자료가 발견되기는 어렵겠지만, 중요한 가설로 논의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1935년의 간사이 공연의 취재기를 쓰면서 교토와 다카라즈카 공연에서도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최승희는 오사카(19351025), 고베(26)의 공연을 마친 뒤, 오카야마(27), 구레(29), 히로시마(30) 등의 주고쿠(中國)지역에서 공연한 다음, 간사이로 돌아와 교토(118)과 다카라즈카(9) 공연을 진행했다.

 

이 일정과 동선이 이례적이었다. 교토와 다카라즈카는 간사이의 도시들인데도 공연을 뒤로 미룬 까닭이 궁금했다. 어째서 히로시마까지 갔다가 간사이로 돌아와 교토와 다카라즈카 공연을 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론이 가능했다.

 

 

첫째는 교토와 다카라즈카가 오사카와 고베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다카라즈카와 교토는 고베와 오사카에서 대중교통으로도 1시간 이내의 거리이다. 오사카와 고베의 공연이 교토와 다카라즈카의 관객을 이미 흡수했기 때문에 추가 공연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론됐다.

 

그렇다면 최승희는 왜 2주 후에 다시 간사이에 돌아와 공연한 것일까? 잠재 관객에 대한 기획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하고 교토와 다카라즈카의 공연이 급조되었던 것일까?

 

실제로 1930년 교토 인구는 77만명으로 고베시의 79만명과 비슷했다. 다카라즈카는 지금도 인구가 22만명의 중소도시이지만 1930년대에는 연간 관광객의 수가 1천만명이 넘는 관광도시였다. 최승희의 공연을 독자적으로 소화하기에 충분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추론도 가능하다. 평론가들은 최승희의 공연을 기획한 안막의 식견과 추진력이 탁월했음을 지적하곤 했다. 주도면밀한 안막이 교토와 다카라즈카 공연의 잠재성을 간과했을 리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간사이 공연을 1(오사카와 고베)2(교토와 다카라즈카)로 나누어 진행한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기획되었다는 뜻이다.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최승희의 간사이 공연이 1차와 2차로 나뉘어 진행된 것은 교토와 다카라즈카의 공연이 급조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전에 그렇게 기획되었기 때문일까?

 

 

이글은 1935년의 간사이 2차 공연이 어떻게 준비되고 실행되었는지 살피기 위한 것이다. 먼저 다카라즈카 공연에 초점을 맞추고, 이 시기가 예술무용과 오락무용의 거리가 멀지 않았던 시기라는 점을 고려하면서, 이미 높은 인기를 누리던 다카라즈카 소녀가극단과 이제 막 스타 무용가로 발돋움한 최승희가 서로 어떻게 교류하고, 영향을 주었는지 살피게 될 것이다.

 

그와 함께 간사이 2차 공연에서는 최승희의 조선무용 공연이 이 지역에 밀집 거주하고 있었던 재일조선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살펴보게 될 것이다. (jc, 2025/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