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준2025길-홍범도

[유준2025길] 6. 적멸(2023)과 도시이야기(2024)

조정희 2025. 2. 6. 12:40

현실과 이상이 서로 반대되는 세계이고, 그 둘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그 두 세계가 동전의 양면이거나, 혹은 그저 투명한 얇은 막으로 나뉜 동일한 세계의 두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얇은 막을 터뜨리기만 하면 현실은 이상적이 되고, 이상이 현실화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일을 제도적으로는 종교가, 개인적으로는 사유가 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유준 화백의 <>전에 출품된 작품 중에 불교와 기독교 소재의 그림이 많은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작가가 을 화두로 삼았을 때는 스키장의 눈길이나 버스에서 내려 양구로 가는 시골길 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가 마땅히 걸어야 할 ()’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겁니다.

 

유준 작가의 이번 전시회의 <>전에서 전시장의 동선상 맨 처음 보게 되는 작품은, 메인 전시장의 입구 왼쪽에 걸린,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상 아래에서 거적을 잔뜩 덮고도 추위에 떠는 노인(아마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이들이 소외되고 방기되고 있음을 고발하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전시장 동선상 가장 마지막에 보게 되는 작품도 보다는 에 대한 것입니다. 법당에서 부처님과 고양이가 마주 보며 법어를 전수받는 듯한 <적멸(2023)>, 그리고 높은 바위산 위에서 십자가상의 예수님과 고양이가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고층건물의 도시를 나란히 응시하는 모습을 담은 <도시 이야기(2024)>입니다.

 

두 작품에 모두 고양이가 등장하는 게 인상적이죠? 개가 인간의 친구라면 고양이는 신의 메신저라고 여겨져 온 것과 무관하지 않은 설정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마프데트나 바스테트, 세크메트 등과 같이 고양이 머리를 가진 신을 형상화한 적이 있고, 오늘날에도 많은 문화권에서 고양이를 여러 개의 목숨을 가진 영물로 여기고 있는 것을 보면, 고양이가 인간 세계와 신의 세계를 넘나들며 그 두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적멸><도시이야기>에 신과 함께 고양이가 등장한다는 점에만 너무 집중하면 놓치는 게 생깁니다. 있어야 하는데 없는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인간이죠.

 

이 두 작품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과 메신저는 있는데, 그 메시지를 받을 인간이 없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이 두 작품은 아주 점잖아 보이지만 가장 통렬한 종교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2년전 <화양연화>전 때였던가요? 유준 화백이 분통을 터뜨린 적이 있습니다. <혜화아트센터>의 작은 전시실에 걸려 있던 화첩일기였습니다. 다른 말들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목사들아, 그만 좀 해처먹어라고 한 일갈은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때 욕을 처먹은 목사들이야 기분 나쁘겠지만, 예수님은 통쾌하셨을 것이라고 느꼈던 기억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채찍을 꼬아서 그만들 해 처먹으라며 휘두르신 적도 있잖습니까?

 

 

그런 면에서는 불교도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려시대 군부독재 시절, 사찰에는 부가 쌓이고 승려들은 화려한 잔치를 이어나갔지만,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고 변명할 수 있는 것일까요?

 

종교는 신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하고, 그대로 살기위해 솔선수범하는 의무를 가진 제도죠. 그런 종교가 자기 역할을 망각하고, 집권자들에게 빌붙으면서 교회/사찰을 제4, 5의 권력기관으로 세워보려고 한다면,

 

그래서 목사/승려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위로하고 돕는 존재가 아니라, 천국이나 극락같은 이상을 무기삼아 현실을 위협하는 존재로 각인된다면, 유준 화백의 고양이한테서 그만 좀 해처먹어라는 일갈을 들어 마땅하겠지요.

 

 

제도로서의 사찰과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할 때에라도, 현실과 이상의 얇은 막은 찢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고해 보이는 그 가리개가 사실상 얇은 막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는 사유가 필요하고, 그 사유를 실천하기 위해 ()’로 떨쳐나서야 하겠지요.

 

<적멸(2024)><묵의 사유’>전에, <도시 이야기(2025)><()>전에 출품된 것이 그냥 우연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것이 제 느낌입니다. (jc, 2025/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