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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1934공연] 23. 공연2부(11) <승무>

조정희 2024. 8. 25. 12:59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 2부의 5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은 <승무()>였다. 프로그램은 <승무>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1. 승무(), 조선고전, 최승희.

이것은 고려말, 송도의 명기 황진이가 당시의 고승이었던 만석승을 유혹하려고 춤을 춘 것에 연원을 둔 춤입니다만, 저는 이것을 그 테마에 따라 새롭게 창작한 것입니다. (최승희)

 

송도의 명기 황진이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 중기이므로, <승무>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말"이라고 명시한 것은 실수나 착오일 것이다. <승무>는 장르와 유파를 막론하고 한국 전통무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목이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1)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유혹하기 위해 추었다는 황진이초연설(黃眞伊初演說), (2) 상좌중이 스승의 범절과 독경과 설법하는 모습을 희롱조로 흉내냈다는 동자기무설(童子技舞說), (3) 성진(性眞)8선녀의 미색에 현혹되었다가 불도를 깨달아 해탈하는 과정을 묘사했다는 구운몽인용설(九雲夢引用說), (4) 파계로 환속했다가 가책으로 번민하는 모습을 묘사했다는 파계승번뇌설(破戒僧煩惱說), (5) 산대가면극 중 노장춤이 기원이라는 노장춤유래설(老長舞由來說) 등이다.

 

도쿄 데뷔공연 프로그램의 해설에 따르면 최승희는 황진이초연설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최승희는 유럽 데뷔공연이었던 파리 살플레옐 공연에서 <승무>1부 첫 작품으로 발표했는데, 프랑스어 제목을 <불자를 유혹하는 여성(Séductrice Bouddhiste)>이라고 붙였다. 유혹녀는 황진이, 유혹에 넘어간 불자가 지족선사였던 것이다.

 

 

도쿄 데뷔공연 프로그램에서 유혹녀를 황진이(黃眞伊, 1506-1567)로 특정한 것은 이해할 만하지만, 상대역을 만석승(萬石僧)이라고 한 것이 의문이다. 절색 황진이가 학자(서화담)과 선승(지족선사)을 여색으로 유혹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은 실패하고 지족선사(知足禪師)는 성공하여 파계시켰다는 야담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만 지족선사의 이름이 다르다. 차상찬(車相瓚, 1887-1946)이 저술한 <한국야담사화전집(1959)> 5권의 황진이편에 따르면 지족선사라는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지족암(知足庵)에서 참선(參禪)하는 중()’이라는 뜻일 뿐이고, 그의 이름은 망석(妄釋)이었다.

 

 

망석은 개성의 천마산 청량봉 밑 지족암에서 10년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사람이다. 그의 이름 망석(妄釋)허망한 부처라는 뜻이니 이 이름도 본명이라기보다는 황진이 유혹 사건으로 파계한 뒤에 붙여진 별명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편찬한 <경도잡지(京都雜誌, 1800년경)> 1권 성기(聲伎)편에는 <만석중놀이>가 나온다. 이는 사월초파일에 상연하는 인형극으로 주인공 만석(曼碩)은 고려의 중이며, 그의 상대역이라 할 수 있는 당녀(唐女)는 예성강가에 살던 중국인 창녀, 소매(小梅)는 옛 미녀의 이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석(曼碩)매우 똑똑하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 만석이 망석인 지족선사와 혼동되면서 동일인물로 구전되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최승희가 어째서 망석(妄釋) 혹은 만석(曼碩)이라는 이름을 만석(萬石)으로 서술했는가이다. 만석(萬石)이란 대단히 많은 곡식을 가리키거나 연간 1만석의 소출을 내는 부자라는 뜻이므로, 망석이나 만석의 뜻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다. 아마도 최승희가 각 이름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혼동해서 발생한 실수로 추정된다.

 

 

<승무>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민간에 널리 퍼진 춤인데, 이를 채집하고 정리하여 근대적인 무대에서 공연하기 시작한 것은 한성준(韓成俊, 1874-1941)이다. 그는 1936년 제1회 무용발표회를 열었을 때 <승무>를 발표 작품의 하나로 포함시켰다.

 

한성준의 <승무(1936)>가 무대에서 발표되기 전인 1934, 최승희는 스승 이시이 바쿠의 권고로 한성준으로부터 조선무용 여러 작품을 전수받은 바 있는데, 이때 한성준이 정리한 <승무>도 최승희에게 전수된 것으로 추측된다. 최승희는 그해 921일에 도쿄청년관에서 개최한 자신의 제1회발표회에서 <승무>를 발표함으로써, 최승희의 <승무(1934)>가 한성준의 <승무(1936)>보다 발표 시기는 빠르지만 사실상 그 원류는 한성준씨였음을 알 수 있다.

 

한성준의 사망 후에는 그의 손녀인 한영숙(韓英淑, 1920-1989)이 승무를 계승했다. 한영숙은 193710월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한성준무용발표회>에 참여해 승무와 학춤, 살풀이춤에 출연해 갈채를 받은 바 있다.

 

 

한성준이 사망한 후, 한영숙은 1942년 한성준무용연구소를 한영숙무용연구소로 개칭하여 한성준류의 춤을 이어갔고, 1955년에는 박귀희(朴貴姬), 박초원(朴初月)과 함께 한국민속예술학원을 개설했는데, 이는 1960년대에 국악인 양성을 위한 <한국국악예술학교>로 개편되어 민속음악과 민속춤을 가르쳤다.

 

한영숙은 승무기예능보유자(1969)와 학춤기예능보유자(1971)로서 국악예술하고, 서라벌예술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를 거쳐, 1981년부터는 세종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임했다.

 

다만 한영숙으로 전승된 한성준의 <승무>와 최승희의 <승무>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우선 길이부터 다르다. 한영숙류 <승무>의 작품길이가 약 26분에 달하는 반면, 최승희의 <승무>5분 이내이기 때문이다.

 

 

한성준으로부터 전수된 한영숙의 <승무>는 전통적인 <승무>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의 <승무>는 스토리라인과 기본 춤새를 받아들이되 완전히 재창작된 작품이다. 근대무용으로서의 신무용, 특히 이시이 바쿠로부터 배운 신무용 창작법에 따르면, 모든 작품은 3-5분 이내로 짧아야 했고, 그 안에 기승전결의 흐름을 주어야 했다. 이는 무용시의 무대상연을 위한 기본 조건이었다.

 

3-5분 정도로 짧아야 했던 것은 이시이 바쿠가 무용을 서사가 아니라 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서사와는 달리 시는 육하원칙이 분명한 스토리의 텔링이 아니라, 느낌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시가 언어로 정조를 전달한다면, 무용시는 신체동작으로 정조를 전달하는 것이다.

 

서사문학이 중장편이 경향이지만, 시문학이 대체로 짧은 것처럼, 무용시는 서사를 전달하기 위한 기존의 무용극처럼 길어서는 안되고, 느낌과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짤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짧은 무용시가 예술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용 동작으로 전달되는 정조가 기승전결의 흐름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밋밋한 동작이 몇십분씩이나 계속되는 것은 보기 좋을 수는 있으나 미학적 가치를 담보하기 어렵다는 것이 무용시 운동가들의 지론이었다.

 

따라서 최승희는 한성준으로부터 <승무>를 배웠지만, 이를 완전히 해체하고 가장 기본적인 요소만을 추려내고 재조립함으로써 자신의 <승무>를 창작해 냈다.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은 최승희가 북한 시절 간행한 <조선민족무용기본(1958)>에 정리되어 있다.

 

 

최승희의 도쿄 데뷔공연의 <승무> 해설은 황진이초연설을 설명하는 데에 그쳤지만, 파리 데뷔공연의 프로그램에는 한 가지 해설이 추가되어 있다.

 

살플레옐 공연 프로그램은 “(무용가가) 승려로 가장하고 절에 들어가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불교도를 타락시킨다고 해설하면서도, 이 춤의 사회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이 춤은 고려인들이 세력이 너무 강해진 불교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시작한 시대를 떠올린다. (Cette danse rappelle l'époque où les Coréens déclenchaient les luttes contre les bouddhistes devenus trop puissants.)

 

불교세력이 너무 강해진 시대란 고려시대를 가리킨다. 사회를 어지럽히고 부패시키는 타락한 종교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승무>는 사회비판의 성격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jc, 2024/8/24)